미군정기의 보험
광복 후 많은 사회 변동과 경제 혼란이 지속되며, 보험사업은 안팎으로 시련과 혼란을 겪는 시기에 접어든다.
1945년 12월 6일 「조선 내 소재 일본재산의 군정청 귀속에 관한 건」(법령 제33호)의 공포에 따라 조선화재보험주식회사를 포함한 일본 보험회사 지점의 재산은 군정청에 귀속되어 관리를 받게 됨으로써, 미군의 보험행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보험업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법적 근거도 없이 보험회사 신규면허를 내주었다.
그 뒤 화재보험회사의 증설이 더욱 필요하게 되면서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8개의 회사가 더 신설되었다. 그리고 생명보험에서는 일본 생명보험회사의 우리 나라 지점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군정청과 교섭, 보험금 반환을 시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1946년 대한생명보험주식회사가 설립되고 그리고 2개의 회사가 더 설립됨에 따라 기존의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를 포함하여 4개 회사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업계의 증설에도 불구하고 사회 불안, 물가상승, 생명보험에 대한 피해의식과 인식부족으로 시장 확대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관영 생명보험인 조선간이생명보험은 광복 후 우리 정부에 의하여 국민생명보험으로 개칭되어 체신부에서 운영하였으나, 계약 건수가 대량 효력을 잃는 등 사업이 위축을 면하지 못하였다.
1947년부터 군정청 손해보험 고문관 스탠턴의 지시에 의하여 일본의 보험업법이 도입, 적용되었다. 조선은행을 비롯한 각급 금융기관이 영업을 개시함에 따라 담보물의 화재보험 가입이 필요하게 되어, 1945년 12월 조선화재보험주식회사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진용을 갖추어 새롭게 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6·25전쟁 기간 중의 보험
정부수립 이후 보험시장은 화재보험을 중심으로 경쟁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의 보험가입은 은행의 담보물과 귀속재산의 불하에 따른 화재보험 강제가입이 계약의 전부였다.
여기에 대한 계약인수 계약이 집중되어 경쟁 배제를 위한 풀(pool)이 결성되었는데, 귀속재산에 대한 관재 풀의 협정이 준수되지 않아서 일시적으로 해체되는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보험사업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보험산업은 더욱 크게 위축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생명보험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화재보험만이 부산 피난지역을 중심으로 은행을 따라다니면서 영업을 하였다.
그 당시 화재보험회사는 위험부담 능력이 부족하여 두 차례에 걸친 자본금의 증자가 있었지만 결국 증자를 이행하지 못하여 보험회사들의 통합 또는 면허정지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처럼 화재보험회사의 위험부담 능력의 부족 때문에 각 회사의 위험인수 한도를 제한하였다. 또한 1952년부터 회사별, 위험물건별로 등급을 새로 정하였다.
전쟁기간 동안 화재보험을 운영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두 차례의 화재사건에 대한 보험금 지급이었다. 하나는 1953년 1월 30일 부산 국제시장의 대화재로, 약 12억 원의 보험금이 지급되어야 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화재로서, 이에는 앞의 것보다 더 큰 보험금이 보상되었다.
이 처럼 손해보험이 화재보험 단일종목에 대해서만 경쟁이 집중되자, 정부는 적하보험을 중심으로 한 해상보험을 운영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1월에는 손해보험회사가 공동으로 대한해상운송보험 공동사무소를 발족해서 처음으로 해상보험을 취급하였다.
전후 보험시장의 재정비
보험시장이 재정비되는 한편, 변화도 많았던 시기는 1954년부터 1963년까지 10년 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화재보험은 손해보험시장의 중심으로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였다. 이는 은행의 담보물과 귀속재산 등의 의무적인 화재보험가입이 가져 온 결과였는데, 특히 은행의 보험료 미납액이 매년 누적되었다.
1953년 대한해상운송보험 공동사무소에서 시작된 해상보험 분야는 1955년에 동방해상보험주식회사와 1959년에 범한해상보험주식회사가 더 신설되어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원조물자(ICA원조)에 대한 적하보험을 인수, 영업하였다.
1954년부터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동방생명보험주식회사 등 4개 회사가 신설되어 상품개발과 모집조직의 정비 등을 통하여 시장개척을 시도하여 1957년부터는 실질적인 영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도 여전히 경제여건이 호전되지 못하고, 임금근로자 수가 적어 생명보험의 보급에는 애로가 많았다.
선박보험은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에 의하여 25건의 보험사고가 발생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명보험 분야는 정부의 적극적인 종용 덕분에 새롭게 정비되었다.
1950년대에는 공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인 보험사업을 하는 단체들이 발족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에는 대한수산중앙회에서 어선공제사업이 시작되었고, 1958년 이후에는 한국해운조합에서 선주상호보험의 일환으로 선박공제와 여객상해공제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1960년대 이후 공제사업 발전에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외국무역회사의 국내 대리점을 중심으로 외국 보험회사들도 활발히 진출해 왔다. 특히 미국 보험회사 단체인 American International Underwriters(AIU, 현재 AHA)는 주한미군과 외국인을 상대로 정식면허 없이 영업하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보험시장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겨우 재건, 정비되었지만,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생명보험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1962년에는 보험업계에 대한 특별감사가 실시되어 자본금의 증자, 보험회사의 정비·통합, 국영 재보험회사의 설립 등을 통한 변혁조치가 단행되었다. 이것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행에 보험회사의 구실과 사명을 크게 기대했기 때문에 취하여진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댓글